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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3편 6절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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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집에 살리라
우리 살 곳. 답은 쉽다. 답을 다 안다. 다윗도 안다. 이 답을 모르는 교인이 어디에 있나. 우리 살 곳은 하나님의 집이다.
(6)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르리니 내가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리로다
여기 '영원히'라는 말은 문자대로라면 긴 날들을 뜻한다. 그래서 번역본이 영원이라 번역한 것 같다. 그런데 우리가 이해하는 영원 forever 가 아니다. 다윗의 이 표현은 전체, 전부를 뜻하는 말이다. 내가 살아가는 모든 날들이다. 이어지는 살겠다는 말은 슈브, 돌아가다 성경에서 구원(본향)으로 향한다는 뜻을 표현하는 말이다. 즉 여호와의 집에 영원히 살겠다는 이 말의 뜻은, 하나님의 집에 온전한 구원이 되었다는 말을 하는 것이다. 이것을 성경에서는 종종 주의 집에 거한다고 말한다. 온전한 구원이다. 이런 구원이 어떻게 일어나는가? 우리가 뭘 잘 해야 온전한 구원이 되는가? 교회 열심히 다니고 헌금 많이 하고 교회 봉사에 빠지지 말아야 하는가? 그렇지 않다. 다윗은 내 평생에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반드시 나를 따른다고 했다. 따른다는 말은 추격한다는 표현이다. 지금 다윗은 쫓기고 있다. 대적들에게 추격당하고 있다. 밤낮을 안 가리고 위험하다. 그런데 다윗이 무엇이라 말하는가? 그 생명의 위협 중에서도 주님의 선하심과 인자하심이 그보다 더 나를 추격한다고, 나를 놓치지 않고 쫓아온다고 말하고 있다. 이것이 다윗의 말을 통해 표현된 하나님의 의지다. 내 목자는 어떤 분이신가? 잃은 양 한 마리를 찾아내시는 분이시다. 기어코 목자는 자기 양을 찾아낸다. 목자의 시선에 나는 숨지도 못하고 대적이 나를 숨기지도 못한다. 그분의 눈, 내 주님의 시야는 내가 바다 끝에 가 숨는다 해도 찾아내신다. 이런 하나님의 성품을 다윗은 헤세드, 인자하심이라 표현했다. 포기하지 않는 사랑이다. 끈질긴 사랑이다. 더러운 고멜을 끝까지 찾아내 품어내는 사랑. 그래서 우리는 이런 목자로 인해 위로를 받는다. 여기에 선하심, 토브라는 좋은 것, 선한 것까지 덧붙여 주신다. 토브는 나에게 선한 것이 아니라 너에게 선한 것을 뜻한다. 주는 나에게 좋은 것이 아니라 받는 너에게 꼭 필요하고 적확하고 좋은 것이어야 토브, 선하다. 하나님은 나에게 가장 필요한 것으로 채우신다. 나를 놓치지 않고 선함으로 인도하신다. 이렇게 말하는 다윗은 어떤 상황을 보내고 있는가? 쫓김과 도망감이다. 사망의 골짜기라 했다. 그러나 다윗은 이것 조차도 하나님의 선하심 안에 있다고 믿고 고백한다. 지금 당장은 괴롭고 아파도 이 고난이 내 인생에 필요한 것임을, 그래서 선한 것임을 믿음으로 고백하는 것이다. 이것이 거친 하나님의 사랑이라, 나를 온전한 구원으로 몰아가시는 아버지의 사랑이라 노래하고 있다. 이 사랑 안에서 내가 온전한 구원이 되어간다. 포기하지 않으시고 하나님은 그렇게 나를 이끌어 가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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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하나님이 책임져 주시는 방법이 있다. 그런데 이런 방법에 대해서 우리는 세속적 방법을 요구할 때가 많다. 내가 바라는 데로, 내가 원하는 데로 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런데 그것은 주권에 대한 바른 반응은 아니다. 주권을 인정하고 받아들인다면 내가 원하는 방법이 아니라 하나님이 뜻하신 것 대로 받아야 한다. 나 원하는대로 해 달라는 것은 순종이 아니라 땡깡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방법으로 일하신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방법은 무엇인가? 바울은 로마서에서 이것을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고 표현했다. 모든 것이 합력한다는 말의 뜻은 우리 인생의 아픔과 고난, 내 생각에는 전혀 필요하지 않은 고통이나 상처까지도 다 합해져서 선, 하나님의 옳다하심, 토브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쫓기는 다윗의 눈에 지금 상황은 무엇인가? 비참하고 처절한가? 아니다. 뭐가 되더라도 하나님의 뜻이 되게 하시는 과정이다. 그런 여정이다. 하나님이 옳다 하시는 결과가 되는 필요과정이라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그래서 어려움을 겪어도 이것도 하나님의 선하심 안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힘들고 괴로워도 하나님의 포기하지 않는 사랑과 선하심이 나를 끝까지 찾아내시니 나는 온전한 구원이 되겠노라 노래한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는 인생임을, 그게 믿음임을 다윗은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나를 나되게 하시고 나를 믿음되게 하시는 하나님의 책임지심이라 고백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고생도 고난도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불안해 하지 말라. 믿음이 되면 아픔도 절망도 결국에는 온전한 구원을 이루게 하시는 발판들이었음을 알게 될 것이다. 요셉도, 다윗도, 모세도, 선지자들도 다 그렇지 않았는가. 성경은 반복적으로 그 이야기들을 들려주고 있지 않은가. 예수님도 결국에는 죽음이 부활로 되지 않는가. 그것이 하나님 뜻이다. 하나님은 동일한 은혜와 섭리로 나를 책임져 주신다. 그러니 믿으라. 포기하지 말고 믿음으로 상황을 받으라. 주님은 나를 포기하지 않으신다. 끝까지 붙잡고 끝까지 추격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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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내 인생을
하나님이 책임지신다.
이것이 나를 향한 하나님의 약속이다.
고난도 억울함도
하나님이 책임지시면 그것이 선함이 된다.
나에게 옳은 것, 좋은 것이 된다.
그러니 불평에 휘둘리지 말고
오늘 믿음이 되라
이것저것 자꾸 따지고 계산하지 말고
믿음이 되어 구원의 길을 다짐하라
이날도
아픔도
버거움도
주의 선하심이라,
내가 그 안에 영원히 살리라 노래하라
시편 23편 5절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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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상을 차려 주시니
시편 23편에서 오해가 많았던 구절이 (5)이다.
(5) 주께서 내 원수의 목전에서 내게 상을 차려 주시고 기름을 내 머리에 부으셨으니 내 잔이 넘치나이다
예전 번역본에서는 상을 베푸시니 라고 했기에 상장 같은 것으로 오해하기 일쑤였는데, 개역개정판은 의미를 바르게 풀었다. 상을 차려주신다. 이때 말하는 상은 식탁이다. 지팡이와 막대기로 나를 보호하시는 목자는 무엇으로부터 나를 지키시고 밥상을 주시는가? 원수다. 이 원수라는 말은 나를 죄어오는 대상을 뜻한다. 질투라는 뜻이 섞여 있는데, 목자와 함께 하는 나를 싫어해서 더 악랄하게 공격하는 대적이다. 시기한다. 그 마음으로 호시탐탐 죄어오며 압박하는 이들이다. 이들에게서 목자는 어떤 은혜를 주시는가? 그 원수의 목전, 즉 눈앞에서 식탁을 차려주신다. 이것이 윤택함을 뜻하는 기름부음과 또, 넘쳐 흐른다는 표현이랑 엇물려 채우시는 목자의 손길을 설명하고 있다. 원수의 목전, 원수가 보라는 듯이 하나님은 당신의 사람들을 먹이신다. 이 식탁은 잔칫상이다. 연회를 뜻하는데, 다윗의 상황이 과연 그러한가? 전혀 아니다. 사망의 골짜기였다. 거기 뭐 먹을 게 있을까? 그런 상황에서 다윗은 잘 먹지도 못했을 것이다. 좋은 것을 먹은 게 아니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다윗은 죽지 않았다. 전전긍긍하는 것 같아도 그는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원수으 ㅣ입장에서 이것은 미치고 환장할 노릇이다. 다윗이 말하는 목자의 식탁은 무엇인가? 공격을 받고 압박을 받아 넘여저 못 일어나야 하는데, 그렇게 밀어내 무너뜨렸는데도 도대체 죽지를 않는 현실을 뜻한다. 인생에 무슨 큰 반전이 있다는 게 아니다. 도대체가 무슨 명이 그렇게 질긴지, 버틴다. 꾸역꾸역 살아남는다. 이것이 어떻게 된 일인가? 그정도면 죽어야 하는데? 어느 때는 고난과 고생을 겪으면서 죽어가는 게 아니라 신앙이 더욱 성장하고 성숙해 간다. 어떻게 이러는가? 이것이 바로 목자의 식탁 때문이다. 먹이시는 목자가 계시기 때문이다. 히브리서는 이렇게 믿음으로 사는 사람은 세상이 감당하지 못한다고 했다. 원수가 별별 짓을 다 해도 성도는 또 버틴다. 질질 끌려가는 것 같아도 또 그 아픔들을 넘어간다. 극복한다. 주님이 먹이시기 때문이다. 머리에 기름을 붓는다는 뜻은 선택하심의 풍섬함에 대한 문학적 표현이다. 나를 선택하신 하나님은 나와 함께 하시고 나를 보호하시고 나를 먹이신다. 채우신다. 이것을 다윗은 내 잔이 넘친다고 했는데, 이게 믿음의 고백이다. 잔이 부족한가? 이미 넘치고 있다. 살아가는 게 기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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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나의 자존심이다
왜 하나님은 이렇게 나를 포기하지 않으실까? 왜 하나님은 이런 삶에도 함께 하시는가? 나에게 주신 하나님의 이름 때문이다. 믿음이 되겠노라 고백했던 이스라엘에게 하나님은, 나는 너의 하나님이 되고 너는 나의 백성이 되라 하셨다. 광야에서 그 백성이 배반했을 때 하나님은 주신 이름이 더렵혀지는 것을 참을 수가 없어 다 죽이려 했다. 그때 모세가 오히려 그것이 이름에 먹칠이라며 하나님을 설득했는데, 놀랍게도 하나님은 모세의 설득을 들어주셨다. 다윗이 말했던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신다는 말이 이것이다. 자기 이름. 그 이름을 내게 주셔서 하나님은 나를 먹이실 수밖에 없다. 나를 채우실 수밖에 없다. 내 삶에 하나님의 이름이 걸려 있기 때문이다. 믿음이라 고백하는 내가 하나님의 자존심이다. 그냥 죽어가도록 두지 못하신다. 자기 이름을 주셨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가 이것을 믿지 못하고 자꾸 부족하다 여기는데 있다. 부족하다 하며 불평이 많아지면 믿음이 되지 못한다. 그게 출애굽 백성의 완악함이 아니었는가. 하나님은 먹이신다. 목자는 반드시 채워주신다. 믿으라. 믿음이 되면 경험한다. 믿음이 되면 지금도 먹이시는 이 날들의 신비를 깨닫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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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아온 날들을 기억하라.
무엇으로 살아온 것인지를 성찰하라.
내 힘으로 살아왔는가?
아니다.
은혜로 살아온 것이다.
뜻으로 먹이시고, 말씀으로 먹이시고
사랑을 먹이셨기에 살아온 날들이다.
이 고백으로 오늘을 살라.
살게 하시는 목자를 믿으라.
원수가 보라는 듯이 상을 차려 주시는 섭리를 믿으라.
원수로 인해 죽지 않는다.
믿음이 없음으로 인해 죽는 것이다.
그러니 믿으라.
결과는 주님이 갖고 계신다.
목자의 섬김으로 내가 살고 있는 것임을
인정하라
시편 23편 4절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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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함께 하심이라
(4)에 와서야 다윗의 현실이 얼핏 보이기 시작한다.
(4)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않을 것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나이다
23편에서 가장 긴 구절인 4절은 시의 구성상, 문맥상 시편 23편의 핵심이다. 긴 구절 중에서도 가장 가운데 자리잡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 이 문장이 핵심 중에서도 핵심이다. 다윗의 현실이 무엇인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다. 여기 사용된 히브리어 문법이 어렵다. 한글역, 영어역 모두 조건절로 ~이지만 ~이다 라는 번역을 했는데, 히브리어 문법은 반복강조를 나타내는 "감"이라는 말을 사용했다. 즉 다윗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반복적으로 경험했다는 뜻이다. 이게 지금 한 번 겪는 일이 아니다. 그전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심지어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이 사실을 스스로가 안다. 고난이라는 것이, 우리 인생에 고생이라는 것이 없어지는가? 그렇지 않다. 다윗은 살아온 날들과 지금의 현실과 앞으로의 미래도 전혀 낙관하지 않는다. 인생은 본래 고난의 연속이요, 하나 해결했다 싶으면 또 하나가 밀려오는 법이다. 젊어서부터 고생을 많이 한 다윗이 자기 인생을 보며 하는 말이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같다. 늘 그런 길들로 걸오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윗은 해를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말한다. 해라는 말은 악을 뜻하는 말이다. 나를 의도적으로 공격하는 악, 하나님의 반대편이다. 그러나 두려워하지 않는다. 왜 그런가?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시기 때문이다. 함께 한다는 이 말도 문법적으로 어렵다. 이것을 히브리어의 불변화사라고 하는데, 확정된 사실을 말할 때 불변화사로 표현한다. 부정이든 긍정이든 확정된 것 즉 변하지 않는 일들이다. 그래서 불변화사로 표현하는데,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나 진실을 말할 때 사용하는 문법적 방식이다. 그러니까 목자이신 내 하나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은 내가 믿던 믿지 않던 불변의 사실이라느 말이 된다. 다윗에게는 이게 위로다. 이것이 은혜다. 목자는 잘못한다고, 죄를 지었다고 버리는 분이 아니시다. 다윗의 하나님은 언제나 함께 하시는 분이다. 이 하나님이 역시 동일한 내 하나님임을 믿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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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호하심
함께 하시는 목자가 해 주시는 일은 무엇인가? 지팡이와 막대기로 도우신다. 지팡이. 이것은 가지, 지파, 갈라진 것을 다스린다는 뜻인데, 쳐내거나 몰아서 합치게 하거나 한다는 뜻을 갖고 있다. 막대기는 몸을 지탱하는 것을 뜻한다. 의지하는 것이다. 이 둘은 목자의 구원에 대한 상징적인 매개물이다. 심볼이다. 목자는 내가 곁길로 빠질 때 지팡이로 몰아간다. 필요 없는 것은 쳐내고 다시 가야 할 길로 가도록 툭툭 찌르고 친다. 그런 나는 온 몸과 삶을 의지하여 내어드린다. 그 이끄심에 나를 드린다. 순종한다. 그래서 다윗은 안위하신다고, 그것이 평강이 된다고 했는데, 나함이라는 이 말은 그냥 편안한 상태가 아니라 나에게 위로가 된다는 고백이다. 때리면 아프다. 툭툭 찌르면 짜증난다. 그런데 그것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다.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 내가 혼자 외로이 고독하게 죽어가는 것이 아니다. 그 어둠 속에서도 툭툭 찔러가며 가야 할 길을 가게 하신다. 잘못된 길로 가면 때려서 아프게 하더라도 목자는 자기의 존재를 알린다. 이게 위로다. 내가 함께 하고 있다고, 너는 혼자가 아니라고, 내가 보호하고 있다고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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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혼자가 아니다.
보이지 않는다고 내가 홀로 남겨진 것이 아니다
어둡다고 내가 버려진 것이 아니다.
힘겹다고 혼나고 있는 게 아니다.
그러니 될대로 되라며 주저 앉지 말아야 한다.
용기를 내라.
끝없이 나를 지지해 주시는 목자가 계신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는 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
이렇다 저렇다 한들 주님 없이는
살아도 산 게 아니다.
임마누엘을 믿으라.
나는 혼자가 아니다.
시편 23편 2-3절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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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나를 인도하신다
쫓기며 숨는 상황에서도 하나님이 계셔서 나는 부족해 하지 않겠다고 믿음을 선언한 다윗은, 부족하지 않은 이유 몇 가지를 제시하는데, 첫 번째는 인도하심이다. (2)과 (3)은 모두 인도하신다는 말로 끝나는데, 우리말 번역은 그렇지만 영어성경이나 원어는 전혀 다른 표현이다. (2)에서 인도는 '나할'인데, 흘러가듯 가는 것을 뜻한다. 이것이 수동형이니까 이끌어 가게 되었다는 표현이 된다. 영어로는 lead, 가도록 그렇게 이끌어준다는 뜻이다. (3)의 인도는 '나하'이다. 영어성경은 guide 로 번역했는데, 대부분 안식과 관련된 동사로, 목적지가 분명할 때 나하를 사용한다. 거기 안식의 자리까지 데리고 간다는 표현이다. 이러한 개념들과 더불어 쫓기는 다윗의 현실적 상황을 배경으로 해당 구절들을 봐야 한다.
(2) 그가 나를 푸른 풀밭에 누이시며 쉴 만한 물가로 인도하시는도다
좋지 않은 상황이다.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쫓기는 때를 보내고 있다. 그런데 무슨 푸른 풀밭, 쉴만한 물가이겠는가. 어떤 하나님이길래 도대체 이런 상황인가. 다윗이 하나님을 안 믿었는가? 열심히, 철저히 믿지 않았는가? 그런데 인도하심이 이런 현실인가? 이게 인도인가? 하지만 이것은 지금 그런 환경이어서 감사하다는 표현이 아니다. 그렇다고 나중에는 이렇게 될 것이라는 희망사항을 노래한 것도 아니다. 보상을 바라고 부른 노래도 아니다. 이것은 믿음의 고백이다. 도망자의 신세여서 숨고 감추고 하고 있지만 다윗은 그것조차도 인도하심, 나할이라 하는 것이다. 목자가 끌고 가시는 마땅한 여정이라 순종으로 받아내며 하는 고백이다. (2)에 표현된 누이신다/눕다는 말, 쉴만한 물가/쉰다는 말은 지금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다. 눕다는 표현은 발을 쭉 뻗는 것이다. 쉰다는 것은 안식과 평강을 뜻한다. 다윗은 이런 상황도 주님 것이요, 주님 인도하심이기에 어려워도 나는 주님 뜻 안에서 발 뻗고 쉬겠다 말한다. 내 하나님이 인도하신 것이라면 내가 불안해 하지도, 불평하지도 않겠다는 고백인 것이다.
(3) 내 영혼을 소생시키시고 자기 이름을 위하여 의의 길로 인도하시는도다
소성시킨다. 이것은 지금 내가 죽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말이다. 지금 내가 산 것인가? 이런 인생이? 다윗은 정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한다. 내가 산 것이 아니다. 나로서는 산 것이 아니다. 나는 죽은 것이다. 그러나 그래서 나는 산 것이다. 내가 살아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살려내셔서 지금도 주님 안에 사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이런 생명이나 목자이신 하나님은 분명한 목적지로 가이드 해 주신다. 어디로 인도하시는가? 자기 이름의 의의 길이다. 구원이라는 결론만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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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른 의미를 부여하라
23편의 내용은 지금 다윗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 알려주는 정보가 전혀 없다. 다만 역사적으로 이 시를 연구한 학자들은 다윗이 도망할 때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아마도 다윗은 이름 없는 어느 습한 동굴에서, 또는 컴컴한 덤불 속에서 머물렀을 것이다. 이것이 무슨 비참한 상황인가. 왕이 이렇게 되어 버렸다. 그러나 다윗은 그런 공간, 상황에 지배 받지 않았다. 오히려 공간에, 자신의 상황에 의미를 부여한다. 어떻게 의미 부여를 하는가? 여기가 푸른 풀밭이다. 내가 발 뻗고 쉬겠다. 이 상황도 주님 인도하신 것이니 쉴만한 물가라고 받아내는 것이다. 주님 없이는 살아도 죽은 것인데, 지금 내가 살아있는 것은 살리시는 분이 계시기 때문이라 말하는 것이다. 구원으로, 생명으로 나를 인도하심을 믿고 있다. 지금도 그 현장이며 그 여정이다. 다읫의 마음은 그렇다. 어떤 상황, 어떤 환경, 때, 공간 등 다윗의 이 고백에서 다윗은 없다. 다윗의 현실은 없다. 오직 주님의 주권만 있다. 현실을 뜻으로 이해하게 하는 주권만 있을 뿐이다.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다윗은 다른 것에 지배 받거나 영향을 받지 않는다.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성도의 현실이다. 그래서 (4)의 고백이 이어지는 것이다.
인도하심을 믿는가? 지금도 그 인도하심의 여정임을 믿는가? 믿음으로 고백할 수 있는가?
부족한 이 현실도 하나님이 이끄시는 중임을 믿는가?
믿어야 한다. 믿어야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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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미를 부여하라.
지금의 상황, 지금의 공간. 지금의 시간에
바른 의미를 부여하라
아담이 세계에 이름을 붙이듯
나도 이름 붙이라
쫓기는 동굴 속에서도 감사라고 이름 붙이라
지붕 없는 들판에서도, 외로워도
거기가 인도하심이라 이름 붙이라
죽을 것 같아도 은혜로 산다고 이름 붙이라
내 이름으로 사는 것 아니요 하나님 이름으로 사는 것이라
내 인생에 이름을 붙이라
주님 이름에 메여 사는 것이라 이름 붙이라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것을 믿으라
지금도 하나님의 인도하심 안에 있음을 분명하게 믿으라
시편 23편 1절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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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편 23편은 너무 잘 알려진 노래다. 가장 유명한 시편이어서 교회 다니지 않는 사람들도 익숙하게 아는 내용이다. 대개 잘 알려진 것은 오히려 제대로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시편 23편도 마찬가지인데, 한 주간 한 구절, 한 구절 손가락으로 짚어가면서 다윗의 고백 속으로 들어가 보고자 한다. 이 고백이 나의 고백이 되어 주님과 동행하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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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다
시편 23편은 다윗의 시다. 이 시편을 상상해보라 하면 대부분 푸른 초원과 평화로운 양떼. 이런 그림을 그리곤 한다. 그러나 시편 23편은 다윗이 쫓길 때 지은 시다. 아들 압살롬의 반란에 쫓겨 골짜기와 동굴을 전전긍긍 할 때 부른 노래다. 따라서 이 시편은 믿음으로 부른 눈물의 노래다. 자식에게 배반 당해 쫓기는 위기에서 다윗이 무엇이라 고백하는가?
(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편 23편에 나오는 모든 동사는 미래형이다. 따라서 이 (1)은 현재는 부족하여도 내 목자되신 하나님으로 인해 나는 부족하지 않을 것이라는 의미이다. 즉 앞으로는 부족해 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이것은 지금 하나님이 내 요구를 다 채워주셨기에 하는 말이 아니다. 현신은 빈 손이요 빈 들에서 쫓기고 있지만 내 목자되신 하나님이 계시기에 나는 이 상황도 부족하다 여기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의 고백이다. 이 믿음으로 고백함에 있어서 다윗은 하나님을 목자로 소유한 것처럼 말한다. 나의 목자다. 나는 목자의 양이라 하지 않고 양이 내 목자라 한다. 소유권의 역치인데, 여기에 우리 믿음의 신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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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되어 주신 하나님
입은 비뚤어졌어도 말은 바로 하라고, 하나님은 누구에게 소유되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님은 그렇게 제한되지 않으신다. 무한이시며 전체이시다. 오히려 반대로 내가 그 분의 소유 안에 있다. 이것이 맞다. 그런데 다윗은 여호와가 내 것이라, 나의 목자라 한다. 어떻게 이런 말을 할 수 있는가? 다윗이 정확하게 은혜의 방식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가? 자신의 소유를 위해, 소유된 것들을 위해 애쓰시는 분이시다. 어떻게 애쓰시는가? 나와 같아지시고, 나를 위해 죽어주시고, 나를 위해 살아나시기까지 하시는 분이시다. 물론 다윗에게 성부와 성자의 분리된 개념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그러나 다윗은 정확하게 이해하고 있다. 하나님은 자기의 소유된 백성을 위해 자기 전부를 내주시는 분이시다. 사랑의 대상을 바꾼 분이시다. 다윗은 이 하나님을 믿는다. 철저하게 신뢰한다. 소유될 수 없는 분이 소유되어 주셨다. 그분의 소유가 된 것을 인정하는 것은 그분을 소유하는 것이다. 구속은 곧 자유이며 메임은 곧 놓임이다. 이것이 소유권의 역치다. 다윗은 모든 것이 풍족해서 부족함이 없다 하는 게 아니다. 비록 지금의 현실은 아프고 쫓기고 부족해도 역치, 부족하지 않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비루한 나의 현실 속에서 부족하지 않다 말할 수 있는가? 내 목자가 계시기 때문이다. 나 같은 죄인에게 소유되어 주신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이다. 부족한가? 부족하다 여기고 그것이 억울한가? 소유권 안으로 들어오라. 주님의 소유하심 안에 들어와 소유되어 주시는 은혜를 맛보라. 소유 되겠노라 인정하고 받아들이라. 그 믿음에 주시는 소유권의 역치, 하나님이 자기 전부를 주시는 이 신비를 누리라. 그때 우리는 노래할 수 있다.
'무화과 나뭇잎이 마르고 포도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 열매 그치고 논밭에 식물이 없어도 우리의 양떼가 없으며 외양간 송아지 없어도..'
그 다음 뭐라 고백하겠는가? '난 여호와로 즐거워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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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유되는 것이 소유하는 것이다.
부족함이 있어도 부족하지 않은 것이다.
내 뜻을 버려도 가장 나은 내가 되는 것이다.
가장 낮은 곳에서 가장 높아지는 것이고
가장 어두울 때 가장 빛나는 것이다.
이 은혜를 내게 주셨다.
이미 주셨다.
다윗처럼 선언하라.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다.